영원한 매력, 귀고리(Earring)의 역사: 장식에서 권위, 그리고 금기로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우리가 흔히 패션 아이템으로 생각하는 귀고리(혹은 귀걸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꾸준히 사랑받아 온 장신구 중 하나입니다. 단순한 치장을 넘어 주술, 신분, 심지어 정치적 메시지까지 담고 있었던 귀고리의 흥미로운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1. 기원과 고대: 부적과 권위의 상징 (전 세계 공통)
귀고리의 역사는 수천 년 전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
주술적 기원: 고대 사회에서 귀고리는 장식보다는 주술적인 의미가 강했습니다. 귀를 뚫는 행위 자체가 재앙이나 질병을 막는 부적의 의미를 가졌거나, 악령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는 믿음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
신분 과시: 고대 메소포타미아(아시리아, 바빌로니아)나 고대 이집트에서는 남성들이 귀고리를 착용하는 것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상징했습니다. 특히 금속 세공 기술이 발달하면서 귀고리는 부와 권력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
굴욕의 상징: 흥미롭게도 고대 로마에서는 귀고리가 노예나 천민 계층을 상징하기도 했습니다.
2. 한국의 귀고리 역사: 남녀노소의 필수품
한반도에서 귀고리는 매우 깊고 화려한 전통을 자랑합니다.
① 선사시대와 삼국시대의 절정
-
신석기 시대: 이미 신석기시대 유적(부산 동삼동 패총 등)에서 결상이식이라고 불리는 옥이나 석재로 만든 고리 형태의 귀고리가 발견되어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삼국시대 (최전성기): 한국 귀고리 역사의 황금기입니다. 특히 **신라의 금귀고리(금제태환이식)**는 정교한 누금세공(금 알갱이를 붙이는 기술)과 화려한 디자인으로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 시기 귀고리는 남녀노소 모두 착용했으며, 크기와 화려함으로 착용자의 신분과 권위를 드러내는 위세품이었습니다. (예: 황남대총, 무령왕릉 출토 귀고리)
② 조선시대: 유교의 금기, 그리고 전통의 단절 ⛔
-
조선 초기: 고려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대부 자제들을 포함한 남성들이 여전히 귀고리를 착용했습니다. 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유교의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 사상과 충돌하는 지점이었습니다.
-
금지령: 결국 조선 중기인 선조(宣祖) 때, 명나라 사신이 조선 남자의 귀고리 착용을 '오랑캐 풍속'이라고 비난하자, 선조는 유교적 윤리를 내세워 남자들의 귀고리 착용을 금지합니다.
-
변화: 이후 남성들은 귀고리를 거의 하지 않게 되었고, 여성들도 귀를 뚫어 고리를 다는 방식 대신 **귓바퀴에 거는 형태('귀걸이'라는 명칭의 유래)**로 바뀌면서 귀고리 문화는 쇠퇴하게 됩니다.
3. 서양 중세 이후의 변천
-
중세 유럽: 종교적 영향과 검소함이 강조되면서 귀고리 착용이 잠시 쇠퇴했습니다. 특히 남성의 경우, 귀고리는 해적, 집시, 하층민이나 반사회적인 인물들(도둑)의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
선원의 귀고리: 거친 항해를 떠나는 선원들은 귀고리를 부적으로 착용했으며, 자신이 죽으면 그 귀고리를 장례 비용으로 쓰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
-
르네상스 ~ 17세기: 셰익스피어 시대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유럽 귀족 남성들 사이에서 다시 유행했습니다. 남성 패션이 여성보다 화려했던 시기였습니다.
-
18세기 이후: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 이후 남성성이 실용주의와 금욕적인 이미지로 재정립되면서, 남성의 귀고리 착용은 다시 비주류로 밀려났습니다.
-
현대: 1960년대 히피 문화, 록 음악의 영향으로 귀고리가 개성과 저항을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부활했습니다. 이후 성별의 구분 없이 패션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 귀고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귀고리는 오랜 역사 속에서 부적, 신분, 금기, 그리고 개성을 담아온 단순하지 않은 장신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착용하는 작은 귀고리 하나에도 수많은 시대의 문화와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